명예의 전당 헌액 명시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무명시인M 2023. 12. 11.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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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평전의 안도현 시인이 백석 시 중 가장 좋아한다는 명시.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출처 : 백석 지음 이동순 편, 『백석 시전집』, 창작과비평사, 1988.
 

🍎 해설

백석 시인에게 매료되어 백석 평전을 저술한 안도현 시인이 백석의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시다. 그 만큼 뛰어난 명시다.
 
한 편의 슬픈 영화와도 같이 장면이 애처롭게 바뀐다.
식민지 조국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며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오려고 애쓰는 젊은이의 모습이 형상화 된다.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시간, 적막한 방에 홀로 앉은 한 젊은이는 남루하고 비참한 현실을, 늙으신 어머니와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리며 사무치는 슬픔과 그리움에 젖는다.
 
청년은 어렵고 지친 자신의 처지를 담담히 바라보는데, 절망에서 끝나지 않는다. 외롭고 쓸쓸하게 태어 났으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고독한 운명을 하늘이 부여한 몫으로 받아들이되 꿋꿋함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조용히 다짐한다.
 
마지막 연에서 거론한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는 마음이 높았으나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 간 사람들, 보잘 것 없는 사소한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형상화 한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에서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와 비슷한 점이 있다.
 
오늘날에도 ‘가난하고 외롭고 마음이 높고 쓸쓸한’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힐링을 주는 듯한 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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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또 내 사랑하는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내 늙은 어머니가 있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나는 이 세상에서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은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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