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수필

이희승 명수필 청추수제 <전문 및 해설>

무명시인M 2023. 11. 2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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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명수필 청추수제.

이희승 명수필 청추수제 <전문 및 해설>. 유명한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의 명수필.

청추수제(淸秋數題)

/이희승

벌레

낮에는 아직도 구십 몇 도의 더위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는다. 그런데, 어느 틈엔지 제일선에 나선 가을의 전령사가 전등빛을 따라와서, 그 서늘한 목소리로 노염에 지친 심신을 식혀 주고 있다. 그들은 여치요, 베짱이요, 그리고 귀뚜라미 들이다.

 

물론, 이 전령사들의 전초역을 맡아 가지고 훨씬 먼저 온 것으로 매미, 쓰르라미가 있지마는, 그들의 소리는 소란한 대낮에, 우거진 녹음 속에서 폭양에 항거하면서 부르는 외침이라, 듣는 사람에게 가을이다.’ 하는 기분을 부어 주기에는 아직 부족한 무엇이 있었다. 그렇더니, 이 저녁에 들리는, 정밀 속에 전진하여 오는 소리야말로, ‘인젠 확실한 가을이구나!’ 하는 영추송(迎秋頌)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오게 한다.

 

전등을 끄고 자리에 누우니 영창이 유난히 환하다. 가느다란 벌레 소리들이 창밖에 가득 차 흐른다.

 

!’ 하는 사이에, 나는 내 그림자의 발목을 디디고, 퇴 아래 마당 가운데 섰다. 쳐다보아도 쳐다보아도 눈도 부시지 않는 수정덩이가, 도시의 무수한 전등과 네온사인에 나 보아란 듯이 달려 있다.

 

저 달이 생긴 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어루만지고 주무르고 꼬집고 하였을까? 원망인들 오죽 쌓였을라고. 그의 얼굴은 따뜻한 듯 서늘한 듯, 쌀쌀하면서도 다정도 하다.

 

성결한, 숭고한, 존엄한 그의 위력에 나는 다시 내 자리로 쫓겨 들어왔다.

 

이슬

이슬은 예술의 주옥편이다. 하기야 여름엔들 이슬이 없으랴? 그러나, 청랑 그대로의 이슬은, 청랑 그대로의 가을이라야 더욱 청랑하다

 

삽상한 가을 아침에 풀잎마다 꿰어진 이슬 방울들의 영롱도 표현할 말이 막히거니와, 달빛에 젖고 벌레 노래에 엮어진, 그 청신한 진주 떨기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할 뿐이다.

 

창공

()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 하늘에는 얼 하나 없구나! 뉘 솜씨로 물들인 깁일러냐? 남이랄까, 코발트랄까, 푸른 물이 뚝뚝 듣는 듯하구나!

 

, 언제부터 호수를 사랑하고, 바다를 그리워하고, 대양을 동경하였던가? 내 심장은 저 창공에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어, 한없는 항해를 계속하여 마지않는, 알뜰한 향연을 이 철마다 누리곤 한다.

 

독서

서중 자유 천종록(書中自有千鍾祿)’이란, 실리주의에 밝은 중국 사람에게 있을 법한 설법이렸다. 그러나, ‘속대 발광 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란 형용이 한 푼의 누리도 없는 삼복 더위에, 만종록(萬鍾祿)이 당장 무릎 위에 떨어진다기로서니, 독서 삼매에 들어갈 그런 목석연한 사람이 있을라고. 지나친 자아류(自我流)의 변설인지는 모르나, 그러기에 나는 60일 휴가 동안 제법 독서 줄이나 하였다고 장담할 뱃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먼 산이 불려나 온 듯이 다가서더니, 아침저녁으로 제법 산들산들한 맛이 베적삼 소매 속으로 기어든다. 벌레가, 달이, 이슬이, 창공이 유난스럽게 바빠할 때, 이 무딘 마음에도 먼지 앉은 책상 사이로 기어가는 부지런이 부풀어 오름을 금할 수 없다. 🍒

 

출처 : 이희승, 딸각발이, 범우사, 2006.

 

🍎 해설

* 書中自有千鍾祿(서중 자유 천종록): 책 속에 녹(관원에게 주는 봉급)이 저절로 들어 있다는 말이다. 곧 학문을 많이 하면 그에 따라 녹도 많아 진다는 뜻.

*속대 발광 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 찌는 듯한 여름 더위에 옷을 갖춰 입고 있으면 괴로움과 더위에 미칠 것 같아서 큰 소리로 부르짖고 싶어진다.

 

역사에 남는 국어학자인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교수가 1930년대에 발표한 명수필이다. 문장이 아름답고 내용이 좋아 1980년대에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많이 수록되었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하늘에는 얼 하나 없구나! 뉘 솜씨로 물들인 깁일러냐? 남이랄까, 코발트랄까, 푸른 물이 뚝뚝 듣는 듯하구나! 내 언제부터 호수를 사랑하고 바다를 그리워하고, 대양을 동경했던가? 내 심장은 저 창공에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어, 한없는 항해를 계속하여 마지않는, 알뜰한 향연을 이 철마다 누리곤 한다.”

 

은 얼룩, ‘은 비단이다. 얼룩 하나 없는 비단이라며 푸른 가을 하늘을 간명하고 아름답게 압축한다.

 

독서를 권장하는 마지막 단락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많은 전문가들이 휴대폰 때문에 청소년들의 독서량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경북 김천고등학교는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해야하는 남자 고등학교다. 입학시 휴대폰을 압수하고 3년 동안 휴대폰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대신에 오후에 독서시간을 갖는다. 학생들 성적이 좋아지고 인성도 좋다고 한다. 전국구 고등학교가 되었다. 국민들도 독서를 해야 한다. 이희승 교수의 독서 권장 수필이 오늘날에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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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달이 생긴 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어루만지고 주무르고 꼬집고 하였을까? 원망인들 오죽 쌓였을라고. 그의 얼굴은 따뜻한 듯 서늘한 듯, 쌀쌀하면서도 다정도 하다.

 

옥(玉)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 하늘에는 얼 하나 없구나! 뉘 솜씨로 물들인 깁일러냐? 남이랄까, 코발트랄까, 푸른 물이 뚝뚝 듣는 듯하구나!

 

먼 산이 불려나 온 듯이 다가서더니, 아침저녁으로 제법 산들산들한 맛이 베적삼 소매 속으로 기어든다. 벌레가, 달이, 이슬이, 창공이 유난스럽게 바빠할 때, 이 무딘 마음에도 먼지 앉은 책상 사이로 기어가는 부지런이 부풀어 오름을 금할 수 없다.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하늘에는 얼 하나 없구나!
남이랄까, 코발트랄까, 푸른 물이 뚝뚝 듣는 듯하구나!
이 무딘 마음에도 먼지 앉은 책상 사이로 기어가는
부지런이 부풀어 오름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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