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수필

피천득 술

무명시인M 2022. 12. 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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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술.

피천득 수필 술. 술도 못 먹으면서 무슨 재미로 사시오? 명수필.

피천득

/술

"술도 못 먹으면서 무슨 재미로 사시오?" 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렇기도 하다.

 

술은 입으로 오고

사랑은 눈으로 오나니

그것이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진리로 알 전부이다.

나는 입에다 잔을 들고

그대 바라보고 한 숨 짓노라.

 

예이츠는 이런 노래를 불렀고, 바이런은 인생의 으뜸가는 것은 만취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백(李白)을 위시하여 술을 사랑하고 예찬하지 않은 영웅 호걸, 시인,묵객이 어디 있으리오. 나는 술을 먹지 못하나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름날 철철 넘는 맥주잔을 바라다보면 한숨에 들이마시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차라리 종교적 절제라면 나는 그 죄를 쉽사리 범하였을 것이요, 한때 미국에 있던 거와 같은 금주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벌금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술을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술을 못 먹는 것은 나의 체질 때문이다.

술도 못 먹으면서 무슨 재미로?

나는 학생 시절에 어떤 카페에서 포도주를 사 본 일이 있다. 주문을 해 놓고는 마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술값을 치르고 나오려니까 여급이 쫓아나오면서 왜 술을 안 마시고 그냥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할말이 없어서 그 술빛을 보느라고 샀던 거라고 하였다. 이 여급은 아연한 듯이 나를 쳐다만 보았다. 그 후 그가 어떤 나의 친구에게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내 이야기를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술을 못 먹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울할 때 슬픔을 남들과 같이 술잔에 잠겨 마시지도 못하고 친한 친구를 타향에서 만나도 술 한잔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피 선생이 한잔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안타깝기 한이 없다. 내가 술 먹을 줄 안다면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을 것이요, 탁 터 놓고 네냐 내냐 할 친구도 있을 것이다. 집에서도 내가 늘 맑은 정신을 갖고 있으므로 집사람은 늘 긴장해서 힘이 든다고 한다. 술 먹는 사람 같으면 술김에 아내의 말을 듣기도 하지만 나에게 무엇을 사 달래서 안 된다면 그뿐이다. 아내는 자기 딸은, 술 못 먹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한다. 아이들도 내가 다른 아버지들같이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오기를 바란다. 술에 취해서 돌아오면 무엇을 사다 주기도 하고 돈도 마구 주고 어리광도 받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본래 소극적인 성질이라도 술에 취하면 평시에 품었던 잠재 의식을 발산시키고, 아니 취했더라도 술잔 들면 취한 체하고 화풀이라도 할 텐데, 그리고 술기운을 빌어 그때마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호탕하게 떠들어 볼 텐데, "문 열어라"하고 내 집 대문을 박차 보지도 못한다. 가끔 주정 한바탕 하고 나면 주말여행한 것 같이 기분이 전환될 텐데 딱한 일이다.

 

술 못 먹는 탓으로 똑똑한 내가 사람 대접 못 받는 때가 있다. 술좌석에서 맨 먼저 한두 번 나에게 술을 권하다가는 좌중에 취기가 돌면 나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고 저희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떠들어댄다. 요행 인정 있는 사람이나 끼어 있다면 나에게 사이다나 코카콜라를 한 병 갖다 주라고 한다. 시외같은 데 단체로 갈 때 준비하는 사람들은 술은 으례 많이 사도 음료수는 전혀 준비하지 않는 수가 많다. 간 곳이 물이 없는 곳이면 목메인 것을 참고 밥을 자꾸 씹을 수밖에 없다.

 

술을 못 먹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큰 손해다. 회비제로 하는 연회라면 그 많은 술에 대하여 억울한 부담을 하게 된다. 공술이면 못 먹고 신세만 진다. 칵테일 파티에는 색색의 양주 이외에 주스가 있어 좋다.

 

남이 권하는 술을 한사코 거절하며 술잔이 내게 돌아올까봐 권하지도 않으므로 교제도 할 수 없고 아첨도 할 수 없다. 내가 술을 먹을 줄 안다면 무슨 사업을 해서 큰 돈을 잡았을지도모른다.

 

술 때문에 천대를 받는 내가 융숭한 환영을 받는 때가 있다. 그것은 먹은 술이 적거나 한 사람에 한 병씩 배급이 돌아갈 때다. 일정 말엽에 더욱 그러하였다. 우리 집 아이들도 내가 술 못 먹는 덕을 볼 때가 있다. 내가 술 못 먹는 줄 아는 제자들이 술 대신 과일이나 과자를 사다 주기 때문이다. 또 내가 술을 못 먹는 줄을 모르고 술을 사오는 손님이 있으면 그 술을 이웃 가게에 갖다 주고 초콜렛과 바꾸어 먹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독신으로 지내는 내 친구 하나가 여성들에게 남달리 흥미를 많이 갖는 거와 같이 나는 술에 대하여 유달리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찹쌀 막걸리는 물론 거품을 풍기는 맥주, 빨간 포도주, 환희 소리를 내며 터지는 샴페인, 정식 만찬 때 식사전에 마시는 술, 이런 술들의 종류와 감정법을 모조리 알고 있다. 술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 자체뿐이 아니라 술 먹는 분위기를 즐긴다. 비 오는 저녁때의 선술집, '삼양(三羊)'이나 '대하(大河)' 같은 고급 요리집, 눈 오는 밤 뒷골목 오뎅집, 젊은 학생들이 정치, 철학, 예술, 인생, 이런 것들에 대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는 카페, 이런 곳들을 좋아한다. 늙은이들이 새벽에 찾아가는 해장국집도 좋아한다.

 

지금 생각해도 아까운 것은 이십여 년 전 명월관에서 한때 제일 유명하던 기생이 따라 주던 술을 졸렬하게 안 먹은 것이요, 한번 어떤 미국 친구가 자기 서재 장 안에 비장하여 두었던 술병을 꺼내어 권하는 것을 못 받아 먹은 일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먹을 수 있는 술을 안 먹은 것, 앞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못 먹고 떠나는 그 분량은 참으로 막대한 것일 것이다. 이 많은 술을 내 대신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인지 또는 그만큼 생산을 아니 하게 되어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나는 연애에 취해 보지도 못하고...

솔직이 고백하면, 나는 술에 대하여 완전한 동정(童貞)은 아니다. 내가 젊었을 때 어떤 여자가 나를 껴안고 내 입을 강제로 벌려 술을 퍼부은 일이 있다. 그 결과 내 가슴에 불이 나서 의사의 왕진을 청하여 오게끔 되었었다. 내가 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쓰려면 주호(酒豪), 수주(樹州)의 ≪명정 사십년(酩酊四十年)≫보다 더 길게 쓸 수도 있지만, 뉴맨 승정(僧正)이 그의 ≪신사론(紳士論)≫에 말씀하시기를, 신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더 안 쓰기로 한다. 나는 술과 인생을 한껏 마셔 보지도 못하고 그 빛이나 바라다보고 기껏 남이 취한 것을 구경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여자를 호사 한 번 시켜 보지 못하였다. 길 가는 여자의 황홀한 화장과 찬란한 옷을 구경할 뿐이다. 애써 벌어서 잠시나마 나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그들의 남자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밤새껏 춤도 못추어 보았다. 연애에 취해 보지도 못하고 사십여 년을 기다리기만 하였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써 놓은 책들을 읽느라고 나의 일생의 대부분을 허비하였다. 남이 써 놓은 책을 남에게 해석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남의 세방살이를 하면서 고대광실을 소개하는 복덕방 영감 모양으로 스물 다섯에 죽은 키츠의 "엔디미온" 이야기를 하며, 그 키츠의 죽음을 조상하는 셸리의 '아도니스' 같은 시를 강의하며 술을 못 마시고 산다. 🍒

 

출처 : 피천득, 피천득 수필선집, 지식을만드는지식, 2017.

 

🍎 해설

"술도 못 먹으면서 무슨 재미로 사시오?" 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렇기도 하다. 명문이다. 피천득 시인은 체질상 술을 못하신다. 그래서 술에 관한 이런 명수필이 탄생하였다. 술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시지 않고 술에 대한 동경이 약간 배어 있는 듯 하다.

 

나는 술과 인생을 한껏 마셔 보지도 못하고 그 빛이나 바라다보고 기껏 남이 취한 것을 구경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밤새껏 춤도 못추어 보았다. 연애에 취해 보지도 못하고 사십여 년을 기다리기만 하였다.” 시인의 담백하고 진솔한 삶이 이 수필에도 배어 있다.

 

술에 대한 명수필은 조지훈 시인의 주도에도 단이 있다는 수필이다. 말술로 알려졌던 그가 술마시는 품격을 바둑 급수처럼 18급부터 시작하여 18단계로 나눠 놓은 것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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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에도 단이 있다(酒道有段)

/조지훈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기고만장하여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현사도 안중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주정만 하면 다 주정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曆)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낼수 있다.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셔도 많이 떠드는 것으로도 주격은 높아지지 않는다. 주도에도 엄연히 단()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로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로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요, 넷째는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가 술 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학주(學酒) -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 주졸(酒卒)

부주(不酒) -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

외주(畏酒) -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알쓰

민주(憫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은주(隱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혼술

상주(商酒) - 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이익이 있을때만 술을 내는 사람

색주(色酒) - 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수주(睡酒) -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반주(飯酒) - 밥맛을 돋우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학주(學酒) -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 주졸(酒卒)

낙주 ( 樂酒 ) -  마셔도 그만 ,  안 마셔도 그만 ,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  주성 ( 酒聖 ) 7 단

여기까지가 바둑으로 치면 아마에 해당한다. 다음의 단수는 프로에 해당한다.

애주(愛酒) -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주종(酒從) 1

기주(嗜酒) -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 주객(酒客) 2

탐주(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주호(酒豪) 3

폭주(暴酒) -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4

장주(長酒) - 주도 삼매에 든 사람. 주선(酒仙) 5

석주(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 6

낙주(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주성(酒聖) 7

관주(觀酒) -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는 사람. 주종(酒宗) 8단 술병에 걸린 사람

폐주(廢酒: 열반주[涅槃酒]) -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9단 술병으로 사망

 

부주, 외주, 민주, 은주는 술의 진경,진미를 모르는 사람들이요, 상주, 색주, 수주, 반주는 목적을 위하여 마시는 술이니 술의 진체(眞諦)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학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 초급을 주고, 주졸(酒卒)이란 칭호를 줄 수 있다. 반주는 2급이요, 차례로 내려가서 부주가 9급이니 그 이하는 척주 (斥酒) ()주당들이다.

애주, 기주, 탐주, 폭주는 술의 진미, 진경을 오달한 사람이요, 장주, 석주, 낙주, 관주는 술의 진미를 체득하고 다시 한번 넘어서 임운목적(任運目適)하는 사람들이다. 애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의 초단이니 주도 (酒道)란 칭호를 줄 수 있다.

기주가 2단이요, 차례로 올라가서 열반주가 9단으로 명인급이다. 그 이상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니 단을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주도의 단은 때와 곳에 따라 , 그 질량의 조건에 따라 비약이 심하고 갈등이 심하다. 다만 이 대강령만은 확고한 것이니 유단의 살력을 얻자면 수업료가 기백만 금이 들것이요, 수행년한이 또한 기십 년이 필요한 것이다. (단 천재는 차한에 부재이다.)

출처 : 1956東卓 趙芝薰, 19563"신태양" 에 기고한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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