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더 큰 희망의 출로가...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송경동
몇 번이나 세월에게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
❄출처 : 송경동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 2016.
🍎 해설
러시아의 시인 푸슈킨의 시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라는 유명한 시가 있다. 푸슈킨 시인은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잖아 기쁨의 날이’ 온다고 그랬다. 그렇다면 조금쯤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사람들은 그래서 아직도 이 시를 좋아한다.
세상에게 몇 번 속아보면 요령이 생긴다. 이제 다 끝이라고 생각될 때에도 가장 여린 초록이 보이고, 그 초록에서 바늘귀만 한 출구가 보인다. 늙은 채 오는 시간은 없다. 시간은 항상 새롭다. 우리가 사는 매 순간은 맨 처음이며 우리는 매일매일 여린 초록과도 같은 아침을 맞는다. 매일 아침 큰 가능성을 갖고 시작한다.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더 큰 희망의 세계로의 출로가 열린다. 확신을 갖자. 세상에게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고 마음을 굳게 먹는 게 낫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광야의 세계를 헤쳐 나갈 수 있는 꿋꿋한 정신이다.
🌹송경동 시인
1967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내일을 여는 작가]와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을 시작했고, 시집 『꿀잠』『사소한 물음에 답함』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천상병문학상, 고산문학대상, 5.18들불상 등을 수상했다.
어려선 소문난 악동이었다. 중학교 2학년 국어 시간에 ‘봄비’를 주제로 시를 써 오라 했다. 숙제니 할 수 없이 써냈는데 처음으로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다. 그 칭찬이 고마워 ‘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지금까지 시를 쓰고 있다. “작가가 되는 건 급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해방 전후 시인 유진오 시인의 말이 멋져 지금껏 ‘거리의 시인’으로 살고 있다.
❄출처 : 송경동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 2016, 작가 소개문.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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