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수필

한국 명수필 이양하 나무 <전문 및 해설>

무명시인M 2021. 1. 11.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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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고독을 안다.

한국 명수필 이양하 교수의 나무를 감상해 보자. 수필읽기는 우선 인내심 훈련이다.훌륭한 문학 장르이다.

 

나무

/이양하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탓하지 아니한다.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득박(得薄)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을 안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움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벌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또 고독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 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 의사(意思)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이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장이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올 뿐 아니라, 어떤 때에는 쏘삭쏘삭 알랑거리고, 어떤 때에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또 어떤 때에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믿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 찾아와 쉬며 푸념하는 것이 귀엽다. 그리고, 가다 흥겨워 노래할 때, 노래 들을 수 있는 것이 또한 기쁨이 되지 아니할 수 없다. 나무는 이 모든 것을 잘 가릴 줄 안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 하여 달만을 반기고, 믿지 못할 친구라 하여 새와 바람을 물리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달을 유달리 후대하고 새와 바람을 박대하는 일도 없다. 달은 달대로, 새는 새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다 같이 친구로 대한다.

 

그리고, 친구가 오면 다행하게 생각하고,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행해 하는 법이 없다. 같은 나무,이웃 나무가 가장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나무는 서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동정하고 공감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기쁘고, 일생을 이웃하고 살아도 싫증나지 않는 참다운 친구다.

 

그러나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데 더 힘을 쓴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하는 것으로 일삼는다. 그러기에,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 들고 있다. 온갖 나뭇잎이 우거진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무에 하나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명(天命)을 다한 뒤에 하늘 뜻대로 다시 흙과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다 장난삼아 칼로 제 이름을 새겨 보고, 흔히 자기 소용이 닿는 대로 가지를 쳐 가고 송두리째 베어 가곤 한다. 나무는 그래도 원망하지 않는다.

 

새긴 이름은 도로 그들의 원대로 키워지고, 베어간 재목이 혹 자기를 해칠 도끼 자루가 되고, 톱 손잡이가 된다 하더라도, 이렇다 하는 법이 없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哲人)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이다. 불교의 소위 윤회설(輪廻說)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출처: 이양하, 신록예찬, 이양하 저 이양하 수필 전집, 현대문학,2001>

 

해설

 

작가 소개

이양하(李敭河, 1904~1963)

영문학자이자 수필가.

 

1930년 동경제국대학 영문과 졸업. 연희전문학교 교수, 서울대 문리대 교수. 권중휘와 함께 포켓영한사전 편찬.

 

피천득과 함께 찰스 램(Lamb, C.) · 베이컨(Bacon, F.) 등 정통적 유럽식 수필을 도입, 본격적으로 에세이를 발표. 그는 종래의 신변잡기적 · 주관적 제재에서 벗어나 생활인의 철학과 사색이 담긴 본격 수필을 시도.

 

이 에세이 나무는 1995년도 대입 수능국어 문제로 출제되었다.췌장암으로 59세에 애석하게 일찍 별세하셨다.

 

역사적인 에피소드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현재의 연세대) 문과 재학시절 이양하는 윤동주의 주임교수(영문학과)였다.윤동주는 졸업 시 졸업기념 시집을 내려고 이양하 교수를 찾아갔다. 이 교수는 윤동주의 시가 모두 항일정신에 가득 차 있어 일제의 처벌이 예견된다면서 출판을 보류시켰다.

 

대신에 윤동주는 서시 등 자신의 시들을 필사본으로 3부 만들어 윤동주가 한 부, 이교수가 한 부,아끼는 후배인 고 정병욱(후에 서울대 국문과 교수)이 한 부 보관하였다. 정병욱은 이 필사본을 일제 시절 학병으로 징용 당해 나가면서 어머니에게 보관을 부탁하였다. 어머니는 고향집 마루밑 땅속에 묻어 잘 보관, 해방 후 정지용 시인의 도움으로 1948년 윤동주 시집을 처음으로 출간하였다.지금도 전남 광양 정병욱 생가에는 조그마한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정병욱과 정병욱의 어머니가 없었다면 우리는 윤동주를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윤동주 시인은 일제 감옥에서 옥사했고, 이양하 교수는 윤동주 필사본을 분실했기 때문이다. 오직 남은 것은 정병욱이 보관하던 필사본 뿐이었다.

 

☞ 초점 해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 고독의 철인(哲人)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賢人)이다.

견인주의란 욕망 따위를 의지의 힘으로 참고 억제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안분지족은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함을 뜻한다.

 

주어진 자리에서 묵묵히 고독을 견디면서 하늘이 준 분수에 맞게 최선의 삶을 살며 거기에 대해 감사하는 나무의 생태를, 성자나 철학자의 모습에 비견하여 예찬하고 있다.

 

자신이 바라는 삶의 모습을 그려 보는 자기성찰의 철학을 담고 있다.

 

나무는 고독을 안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고 정병욱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주옥 같은 시를 어머니와 함께 필사적으로 보관, 우리에게 알린 우리의 은인이다.

사진: 네이버 블로그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에서 포스팅

나무는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탓하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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