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좋은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기다림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착어: 기다림이 없는 사랑이 있으랴. 희망이 있는 한, 희망을 있게 한 절망이 있는 한. 내 가파른 삶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한다. 민주, 자유, 평화, 숨결 더운 사랑. 이 늙은 낱말들 앞에 기다리기만 하는 삶은 초조하다.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두부 장수의 핑경 소리가 요즘은 없어졌다. 타이탄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온 사람이 핸드 마이크로 아침부터 떠들어 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디선가 병원에서 또 아이가 하나 태어난 모양이다. 젖소가 제 젖꼭지로 그 아이를 키우리라. 너도 이 녹 같은 기다림을 네 삶에 물들게 하리라.
* 착어(着語): 작품 후기
❄출처 :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개눈 속의 연꽃, 문학과 지성, 1990.
🍎 해설
시마다 방아쇠가 있다. 이 시의 방아쇠는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너에게 가고 있다.’이다. 이게 기다림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나의 마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것이기에 현재의 절망으로부터 나를 미래로 향하게 만든다. 소망을 기다리는 믿음과 의지가 중요하다. 그것만 확고하다면 우리는 소망을 드디어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휴대폰 시대에 살고 있다. “너 지금 지하철 무슨 정거장을 통과하고 있어?” 기다림을 잃어 버린지 오래다.
시인이 작품 후기(착어)에서 말한 것처럼 기다림은 삶을 녹슬게 한다. 바로 삶을 녹슬게 할 정도로 소중한 것을 기다리는 그 간절함과 열정과 의지가 그립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효근 좋은 시 버팀목에 대하여 (0) | 2021.04.22 |
---|---|
박목월 좋은 시 송가 (0) | 2021.04.21 |
류시화 좋은 시 소금인형 (0) | 2021.04.18 |
신경림 좋은 시 아버지의 그늘 (0) | 2021.04.17 |
복효근 좋은 시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0) | 2021.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