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명시 너. 이 블로그는 이 시를 '명예의 전당 헌액 명시'(카테고리)로 선정하였다.
너
/피천득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 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가는
너.
❄출처: 피천득, 너, 피천득 문학전집 세트, 샘터, 2017.
🍎 해설
우선, ‘너’는 이 세상을 왔다 가는 모든 사람을 지칭한 것으로 해석된다.
인간인 너는 어느 순간 나타나 나래를 털고 앉았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다. 네가 눈보라 헤치며 날아온 그 비밀을 나는 알 수가 없다. 허나 알 수 있는 건 네가 지금 나뭇가지에 잠시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너란 인간은 언젠가는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간다. 너는 과연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버릴 것인가?
다음, 인연이 생각난다. 예를 들면 아사코다. 세 번을 만났어도 그녀는 아득히 사라져만 갔다. 아사코여, 너와 나의 인연. 너는 어느 순간 내 옆에 나래를 털고 앉았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다. 네가 눈보라 헤치며 찾아온 그 비밀을 난 알지 못한다. 그러나 네가 찾아온 짧은 순간이 나에게는 진정 기쁨과 행복이었음을 나는 너에게 고백한다. 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그게 우리의 인연이고 인간의 숙명이니 어찌 하겠는냐.
피천득 시인은 생전에 자신의 자작시 중에서 이 시를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성금을 모아 시인의 묘소에 이 시를 아로새겨 놓은 시비(詩碑)를 세웠다.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그저 얼마 동안 앉아 있다가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가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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