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근 안부
정병근 안부. 이번 연말에는 안부만 묻지말고 밥 한 끼 같이 먹기를...
안부
/정병근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이
어디 약속뿐이랴 뱉은 만큼
못다 한 말들 입속에 바글거리고
만나면 만날수록 결별만 수북수북 쌓인다
그런 게 다 인생이라고 나는 제법
늙어서 흰머리를 툭툭 털면서
발톱을 깎으면서 안경알을 닦으면서
생각하건데, 나는 죄의 신봉자였으니
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
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
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
나, 이윽고 죄 많아 빼도 박도 못하겠으니
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하자
❄출처: 정병근 시집, 『태양의 족보』, 세계사, 2010.
🍎 해설
‘언제 한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은 흔히 전화 통화를 끝낼 때 그냥 끊기가 무엇해서 하는 인사치레다.
그러나 우리가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가장 명료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껏 안부를 묻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더 늙고 피폐해지기 전에 한잔할 사람과는 한잔하고 밥을 먹을 사람과는 꼭 밥을 한 끼 먹는 게 좋다. 특히, 금년 연말에는...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
그런 게 다 인생이라고
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
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
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
나, 이윽고 죄 많아 빼도 박도 못하겠으니
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