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정병근 안부

무명시인M 2024. 12. 17.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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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근 안부.

정병근 안부. 이번 연말에는 안부만 묻지말고 밥 한 끼 같이 먹기를...

안부

/정병근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일이

어디 약속뿐이랴 뱉은 만큼

못다 한 말들 입속에 바글거리고

만나면 만날수록 결별만 수북수북 쌓인다

그런 게 다 인생이라고 나는 제법

늙어서 흰머리를 툭툭 털면서

발톱을 깎으면서 안경알을 닦으면서

생각하건데, 나는 죄의 신봉자였으니

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

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

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

나, 이윽고 죄 많아 빼도 박도 못하겠으니

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하자

 

출처: 정병근 시집, 태양의 족보, 세계사, 2010.

 

🍎 해설

언제 한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은 흔히 전화 통화를 끝낼 때 그냥 끊기가 무엇해서 하는 인사치레다.

 

그러나 우리가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가장 명료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껏 안부를 묻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더 늙고 피폐해지기 전에 한잔할 사람과는 한잔하고 밥을 먹을 사람과는 꼭 밥을 한 끼 먹는 게 좋다. 특히, 금년 연말에는...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를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약속은 아직 먼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동문서답의 헛바퀴를 돈다

 

그런 게 다 인생이라고

일기장은 날마다 내게 반성을 촉구했고

지키지 못했으므로 반성은

더 많은 반성을 몰고 왔다

나, 이윽고 죄 많아 빼도 박도 못하겠으니

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하자

언제 한 번 만나자는 말 조만간 한잔하자는 말
믿지 말자 전화 끊으면서 그것은 내가 한 말이기도 했으므로
만나면 만날수록 결별만 수북수북 쌓인다
그대 어디쯤 잘 계시는가 제법 늙었는가
이 꽃이 지기 전에 우리, 폐단처럼 꼭 한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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